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창밖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와 함께 귓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묘한 힘이 있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
부엌으로 향해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리고, 서랍에서 아껴두었던 원두 봉투를 꺼냈다. 그윽한 커피 향이 퍼져나가자, 잠기운이 서서히 달아나는 듯했다. 드리퍼에 곱게 간 커피 가루를 담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톡톡 터지는 커피빵과 함께 더욱 짙어진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온기마저 포근하게 느껴졌다.
창가에 놓인 낡은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음미했다. 쌉싸름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혀끝을 감싸고,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 이 작은 여유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문득 미국의 소설가, 도로시 파커의 말이 떠올랐다. “삶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의 이 느긋한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창밖 풍경은 온통 흐릿한 회색빛이지만, 그 속에서도 작은 움직임들이 눈에 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고양이, 빗물에 젖어 더욱 짙어진 녹색 잎사귀들. 그 소소한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귀가 떠올랐다. “작은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결국에는 우리 삶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그 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다 마시고, 책장에서 오랫동안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 들었다. 빗소리를 배경 삼아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때로는 책 속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커피와 책 한 권이 있는 오후는 그 어떤 화려한 시간보다 소중하고 평온하다.
창밖의 빗줄기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하지만 아침의 차가웠던 기운은 따뜻한 커피와 책 속의 이야기 덕분에 어느덧 포근함으로 바뀌었다. 특별할 것 없는 흐린 날의 오후이지만, 이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는 작은 행복을 발견한다. 낡은 흔들의자에 기대앉아, 떨어지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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